1장 잃어버린 그 맛 배고픈 날, 장떡 지지던 냄새/시커멓게 언 감자를 먹는 지혜/옥수수 먹듯 산천어를 뜯으며/… 2장 낯선 땅에서 사정없이 대가리를 우적 깨물면/어리떨떨하다가 정신이 번쩍/사람 거시기 먹고 자라는 돋통시/… 3장 유배지의 한 끼니 철모에 삶아 먹은 닭 두 마리/0.8평 감방에서 ‘소지’와 함께/싸락눈 날리던 날, 눈물의 부침개/… 4장 나그네살이 까마귀가 먹다 버린 배/장난감 같은 독일의 가정 식당/나이 든 창부 같은 도시, 베네치아/… 5장 흘러간 사랑 기억의 고리, 그 시작과 끝/세상으로 나가는 남자의 ‘창’/마당 한 귀퉁이의 쓸쓸한 과꽃처럼/…
이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 황석영의 음식 에세이 《노티를 한 점 먹고 싶구나》(이후 ‘황석영의 맛과 추억’으로 제목 바뀜)가 《황석영의 맛있는 세상》으로 재출간되었다. 곡절 많은 세월과 장소에 얽힌 음식 이야기이자 인생 방랑기인 《황석영의 맛있는 세상》은 이미, 최근 하나의 장르로 굳어진 음식 에세이 분야에서 대표주자 격으로 이름나 있다. 이는, 이 책이 ‘옛것 만세’류의 단순한 요리 회고담이나 온갖 진귀한 음식이 등장하는 식도락가의 편력기가 아닌, 삶의 진정성이 살아 있는 한 편의 문학작품으로, 음식이란 결국 사람끼리의 관계를 담고 있으며 시대의 상징이자 문화의 핵심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리라.
한국 문학의 거장 황석영이 쓴 자전적 요리 에세이
“황석영이 가는 곳에 따라 가지 마라”는 경고성 농담이 나올 만큼, 현대사를 대표하는 굵직한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언제나 그 현장에 있었던 작가 황석영. 그렇게 극적인 삶을 살아온 그가 곱씹는 맛의 기억이란 그만큼 파란만장한 사연들을 품고 있을 수밖에 없다. 작가는 유년의 피난 시절부터 시작해 가출과 입산, 베트남 전쟁과 민주화·통일 운동을 지나 방북과 유럽 망명과 수감 생활로 이어지는, 참으로 순탄치 않았던 세월 속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양한 먹을거리 체험과 버무려 맛깔스럽고 눈물겹게 풀어낸다. 그에게 음식은 단순히 ‘혀의 경험’이 아니라 소통의 매개이자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에 영향을 주는 최초의 동기인 것이다.
“맛있는 음식에는 노동의 땀과 나누어 먹는 즐거움의 활기, 오래 살던 땅, 죽을 때까지 언제나 함께 사는 식구, 낯설고 이질적인 것과의 화해와 만남, 사랑하는 사람과 보낸 며칠,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궁핍과 모자람이라는 조건이 들어 있으며, 그것이 맛의 기억을 최상으로 만든다.” (머리말 중에서)
사람과 세상을 웅숭깊이 품어내는 한 편의 문학작품
《황석영의 맛있는 세상》은 여느 음식 에세이와 달리 한 개인의 먹을거리 경험을 소개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안에는 좌절과 아련한 슬픔으로 얼룩진 우리의 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작가가 만난 사람들은 그러한 현대사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우리네 식구나 이웃들과 다름없다. 때문에 절집에서부터 전쟁터, 북한, 감옥, 유럽에 이르기까지 각지에서 맛본 온갖 음식들로 짚어나간 작가의 인생 이야기는 마치 우리 모두의 기억인 듯 살갑게 가슴을 적신다. 결국 《황석영의 맛있는 세상》은 ‘체험’과 ‘서사’라는 키워드로 집약할 수 있는 황석영 문학을 잇는, 또 한 편의 소설 같은 에세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석방되던 마지막 해의 겨울에 눈 오는 날, 카드깡으로 들어온 준식이와 부쳐 먹던 김치전을 생각한다. (…) 실내에서는 다른 재소자들 눈이 있으니까 ‘만기방’이라고 석방 이틀 전에 나가서 묵는 독립 사동에 가서 연탄아궁이 불에다 부침개를 부쳤다. 머리 위로는 싸락눈이 풀풀 날리고 우리는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마가린을 프라이팬에 녹여 김치를 섞은 밀가루 반죽을 부어서 부쳤다. 역시 김치부침개는 잘 익으면 귀퉁이가 아삭거리고 고소하고 제일 맛이 있다. 거길 떼어 먹다가 바라보니 준식이 눈에 눈물방울이 고였다가 톡 떨어진다. “왜 그래, 뜨거워서 그러냐?” “아니요.” “그럼 뭣 땜에 그래?” “어머니 생각나서요.” (pp.143~144)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시키는 《황석영의 맛있는 세상》
《황석영의 맛있는 세상》에는 특별히 진귀한 요리나 미식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모두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료로 만든 소박한 음식들이다. 어린 시절 옆집 소녀가 쥐여주던 누룽지부터 시작해서 김일성 주석과 먹었던 언 감자국수, 군대 시절 철모에 삶아 먹은 닭 등 한편으로는 소박하고 한편으로는 가슴 찡한 음식들이 주류를 이룬다. 남도와 제주 등지의 향토 음식이나 감옥에서 만들어 먹었던 부침개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요즈음 대중식당의 차림표와 음식은 서울에서 저 남도 끝이며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어슷비슷한 맛”이라는 작가의 한탄처럼, 지금은 대부분의 것들이 그 본래의 맛을 잃어버렸다. 사람이 변한 건지, 세월이 변한 건지 알 수 없다. 《황석영의 맛있는 세상》은 바로 그, 소박하면서도 풍요로운 우리네 음식들과 사람 관계의 ‘진짜 맛’을 생생하게 되살려주는 책이다.
총 
바보 빅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