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형경씨의 장편소설 "세월"이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1억원 고료 제1회 ||^국민일보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김형경씨가 자신의 파란많은 체험을 바탕으로, ||^그 여자||^김형경을 키운 10할의 세월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10할의 세월은 화자(話者)인 ||^그 여자||^가 ||^그 아이||^에서 ||^그 여학생||^을 거쳐 ||^그 여자||^가 되기까지, ||^그 여자||^를 탁마시킨 도저한 상실의 세월을 일컫는다. ||^그 여자||^는 작가가 작가와 작품 사이의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을 3인칭으로 지칭한 것이다. 그의 두 번째 장편인 "세월"은 작가가 30여년 동안 안으로만 삭이고 있던 ||^봉인된 시간||^의 안쪽을 송두리째 뒤집어 보인 것. ||^그 여자||^의 어머니 이야기와 아버지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가 한데 어우러진 ||^유난스러웠던 가족사며 성장기||^, 지금도 ||^그 여자||^를 ?통스럽게 하는 성폭행을 낱낱이 털어놓고 있다는 점에서 적잖은 파문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 30여 년의 세월, 그 ||^봉인된 시간||^의 피봉을 뜯다!
||^그 여자||^가 강릉, 수원, 강릉, 서울, 여수, 경기도, 다시 서울을 무대로 집 없는 민달팽이처럼 떠돌아다니게된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외도로부터 비롯된다. 그 불화의 여진 속에는 부모의 별거로 하숙집에 맡겨진 두 남매가 있고, 위인전과 세계문학전집이 있고, 하숙과 자취생활이 있고, 선생님과 학교가 있다. 그리고 성장통과 첫사랑, ||^잿빛 바바리||^의 뒷모습과 ||^그 남자||^의 충혈된 눈빛, ||^그 남자||^로부터의 성폭행과 7년동안의 고통, 사회와의 타협과 세상 속으로의 진입, 통 속의 안팎과 남성 이데올로기, 자신을 얽매고 있던 자의식과 도덕적 강박관념들, 그 모든 것을 잃고도 ||^그 여자||^가 끝끝내 버리지 않은 문학과 관해, 열한 살 이후 계속되어온 상실의 기억들을 퍼내고 있다. 이 소설은 외형상, 화자인 ||^그 여자||^가 산 위로 올라갔다가 지난날을 회상하고, 하산하는 과정을 밟고 있다. 그 산은, 한 계집아이가 어른이 되기 위해 ||^어금니를 물면서 상실감을 참고, 입술을 깨물며, 모든 회한과 굴욕||^을 참으며, 그렇게 넘어온 고난의 산이다. 작가는 이같은 이야기를 하나의 물방울이 상류에서 하류로 나아가 마침내 드넓은 바다와 마나는 상황 속에 밀도있게 배치시킨다. 이 소설의 흥미로움은 바로 이 점에 있다. 예컨대 하나의 물방울이 시원지를 떠나 하류로 흘러 흘러 마침내 바다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곧 화자가 ||^그 아이||^에서 ||^그 여학생||^을 거쳐 ||^그 여자||^가 되기까지의 성장과정이자 세월의 도저한 의미를 깨닫는 수행(修行)의 과정에 다름 아니다.
▶ ||^그 아이||^에서 ||^그 여학생||^으로, ||^그 여자||^로
"그 여자는 지금, 하나의 작은 물방울이다" 이 소설은 먼저 물방울에 불과한 ||^그 여자||^가 ||^그 아이||^라고 부르는 국민학교 시절부터 시작한다. ||^그 여자||^의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그 여자||^, 남동생, 그리고 두 명의 어린 동생으로 구성된 단란한 가정이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불행이 찾아든다. "어느 날 모든 게 달라졌다. 어머니가 아프고 아버지가 회사를 그만 두었다." 어머니가 왜 아픈지, 아버지가 왜 아픈지 모른 채, ||^그 여자||^와 남동생의 삶은 이 알 수 없는 불화의 틈 바구니에 낀다. 자상하고 감정적인 아버지와 이상주의자이자 이성적이며 서사적인 어머니 사이에 생긴 불화는 아버지의 외도 때문이었고, 결국 부모의 별거로 어린 두 동생은 어머니에게, ||^그 여자||^와 남동생은 아버지의 손에 맡겨진 채 무수한 하숙집과 자취방을 전전한다. 열두살 때부터 시작된 이런 생활은, 부모의 불화로부터 기인한 자폐적 태도를 보다 강화시키며, ||^그 아이||^로 하여금 세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기보다는 세상을 상처나 혼란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 시절, 이미 스슬를 달래기 위해 혼자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공상에 빠져들던 ||^그 아이||^는 서서히 개천으로 나아가 ||^그 여학생||^으로 성장, 세상살이의 힘겨움에 눈뜬다. 예컨대, 아버지가 친척집이라고 소개하며 자신을 맡긴 그 집이 실은 돈을 받고 보살펴주는 하숙집임을 알았을 때, 그리고 중학교 시절 친구 보경이와 만남과 이별, 동생의 자퇴 앞에 망연자실하던 ||^그 여학생||^은 점차 세계에 대한 적의를 다지면서 누에고치처럼 단단한 자의식의 굴레를 만든다.
▶ 눈물 바가지로 퍼낸 상실의 세월!
"청산하지 못한 과거는 미래야. 넌, 네 얘기를 쓰지 않으면 앞으로 소설을 세 편 이상 쓰지 못할 거야." 작가는 오래 전부터 친구들로부터 이런 힐책성 주문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주문을 도외시하고 대중문화를 친착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작가는 그 소설이 1천매쯤 나갔을 때, 펜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있다간 그 세월의 하중에 자신이 압사되어버릴 것 같아, 부랴부랴 지난해 11월 16일부터 시작해서 2월말까지 설악산에 틀어박혀 울면서 이 소설을 썼다. ||^그 여자||^가 ||^그 아이||^에서 ||^그 여학생||^을 거쳐 ||^그 여자||^로 ||^강릉의 남대천||^만한 하천의 상류쯤에 들어설 때, 평생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던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대학 1학년 때, 시골에서 갓 올라온 19살짜리 여자가 대학이라는 것이 그렇게도 사람을 외롭고 절망하게 만드는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 그때 알게 되었던 어떤 사람. 그로 인한 어떤 사건. 현실이 무엇인지, 문학이 무엇인지 몰라 초조해하던 새내기 시절, ||^그 여자||^는 앞으로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될 두 명의 남자를 만난다. 같은 하년인 ||^잿빛 바바리||^와 연극부 부장이자 2년 선배인 ||^그 남자||^?지만 ||^그 여자||^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사물을 제것으로 해석하는 눈을 가진 ||^잿빛 바바리||^에게 끌린다. 그들의 은밀한 가슴앓이는 졸업 후에도 계속된다. 그러나 ||^그 여자||^는 자아도취적인 자기애와 광기에 가까운 열정을 가진 ||^그 남자||^에게 치욕적인 성폭행을 당한다. 그리하여 ||^그 여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함께 하기로 마음 먹는다. ||^그 여자||^가 ||^그 남자||^의 여자가 되기로 작정했을 때의 수락 이유는 요즈음의 가치관으로 보기엔 비현실적이다. 순결을 가져간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 는 어머니의 유교적인 교육방식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그들의 일그러진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파경에 이른다. ||^그 여자||^는 ||^그 남자||^로부터 당한 폭행의 어둡고 굴욕적인 기억으로부터 비로소 자유를 맛본다. ||^그 여자||^에게서 성장이란 태어나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상실의 품목이 많아지고 상처가 깊어진다는 것이었고, 낙원에서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그 여자||^는 지금도 얼마든지 갈등없이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 ||^상처를 간직하는 작가의 삶||^과 ||^상처 없이 작가 아닌 삶||^을 살라고 한다면 서음없이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 통속의 길에서 찾아낸 넉넉한 화해의 손길!
이러한 상실의 세월 속에 터지는 ||^그 여자||^의 내출혈은 다분히 어머니의 가르침과 책, 그리고 자신의 기질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그 여자||^는 자신을 얽어매던 어머니의 도덕적 가르침과 숱한 책들이 준 환상을 버리고, 모든 독선과 고집을 버리고, 지나치게 예민한 감수성과 날선 자의식의 껍질을 깨려고 노력하는 순간 비로소 통속을 보게 되고 ||^그 여자||^는 그것을 수용한다. 그토록 부정적으로 인식했던 통속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 세상의 본질과 통하고, 이 세상의 흐름을 관통하는 것이 바로 그 통 속의 길이었다. 이처럼 통속적이 되려는 순간 ||^그 여자||^는 스물일곱살에 겨우 ||^그 아이||^에서 ||^그 여자||^가 된다. 그 사이사이에는 많은 사연들이 접혀 있다. 여수에서의 사립학교 교사시절, 사랑과 성(性)에 대한 자신의 백치, 딴살림 차린 아버지를 잊지 못하는 어머니, 아버지콤플렉스로 인해 모든 어른들에 대해 품었던 흠모의 정, 스물일곱에 바로잡은 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상, ||^그 남자||^와 헤어진 후 실패한 또하나의 사랑, ||^그 여자||^를 키운 8할인 친구 이야기, 그리고 상실의 골짜기에서 힘이 되어준 대중음악과 관련된 사람들의 음악과 삶에 대한 열정 등이 진솔하게 펼쳐진다. 그런 가운데 시원지를 떠난 물방울은 마침내 드넓은 바다에 도착하게 되고, ||^그 여자||^는 서서히 자신과 불화했던 세상을 향해 손길을 내민다. "너느 나이에 이르기 전에는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어느 나이에 이르기 전까지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이치가 있는 법이다. 어느 나이에 이르기 전에는 감히 도달할 수 없는 사유의 깊이가 있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세월이다. 시간이 퇴적층처럼 쌓여 정신을 기름지게 하고 사고를 풍요롭게 하는, 바로 그 세월이다. 그러므로, 세월 앞에서는 겸허해야 한다. 누구도, 그 사람만큼 살지 않고는 어떤 사람에 대해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누구든, 그 사람과 같은 세월을 살아보지 않고서는." 이처럼 바다와의 합일을 향한 물방울의 지난한 행각은 곧 자신의 상처로 세상의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자 다시 그 상처와 하나가 되는, 넉넉한 화해의 몸짓이었다. ||^그 여자||^는 이런 과정을 통해 아무리 깊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더라도 다시 떠오를 수 있는 힘, 물체가 가진 질량만큼 떠오르는 힘, 즉 바다의 부력을 습득한다. ||^그 여자||^에게 바다는 더 이상 파도나 갈매기가 떠 있는 평화로운 풍경이 아니라 ||^부력(浮力)||^의 미덕을 가르쳐준 스승으로 자리한다.
▶ 삶의 고통을 문학의 품속에서 위로받는다!
한편 이 소설은 문학과 관련된 작가의 삶과 문학관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흥미를 더한다. 문학에 입문하게 된 계기, 세 차례의 문학상 당선, 시집 출판, 현재 준비중인 대중문화에 관한 소설쓰기, ||^그 여자||^가 읽은 숱한 이야기, ||^그 여자||^에게 있어서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 등 ||^그 여자||^의 고백을 통해 우리는 문학에 관한 작가의 생각 전반을 확인해볼 수 있다. 그것은 책을 통한 배움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삶으로 검중해낸 것이기에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그 여자||^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사는 이유가 없기 때문이며, 아이를 낳아 기르고 남편을 위해 저녁 밥상을 차리고 하는 그 모든 일에 대한 대신이었다. 그리고 문학에 진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삶의 골목에서 넘어질 때마다 여자는 문학에 의지해서 몸을 일으켰고, 문학에 비추어서 길을 걸어나갔다. 그래서 "문학을 생각하면, 오래 함께 산 부부 같은 마음이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여자||^가 대학교 때 썼었다는 중편 ||^바다의 묘지||^에 곤한 이야기 중에 한 다음과 같은 말은 ||^그 여자||^의 삶이 어떻게 자품 속에 투영되어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완전한 허구의 이야기를 꾸며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결국 거기에도 그 여자가 들어 있다. 그런 이야기를 꾸며낸 그 여자의 무의식을 들여다보면, 강릉에 남겨둔 동생에 대한 미안함, 수배중인 친구며 후배들에 대한 죄의식, 하숙집 할머니들에 의해 키어진 상실감, 그런 것들이 복합되어 있다. 물론 그때는 그런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 이처럼 ||^체험은 장착의 원료||^라는 명제를 확인케 하는 이 말은 ||^그 여자||^삶의 무의식적 반영물로서, 자기문학의 한 양상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고백이 아닐 수 없다.
▶ 작가 김형경의 문학적 성년식! ||^여성 성장소설||^의 진수!
대부분의 소설가에게는 가장 하기 힘들면서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다. 끊임없이 작가를 억압하는 그 이야기가 벽으로 존재하는 한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작품을 써낼 수 없고, 그러기에 작가는 그 이야기를 토하고 나서야 비로소 더 넓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세월"은 작가 김형경에게 있어 바로 그 이야기이다. 삶의 진실성과 문학성이 한몸을 이룬 이 장편은 이른바 작가의 문학적 성년식이자 그 문학세계의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를 괴롭혀오던 ||^기구한 세월||^이 이제 작가를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 여성의 성장소설은 없는가.||^라는 의문을 가진 독자들에게, 작가는 인간의 감슴 깊은 곳을 훑어내는 생의 깊은 슬픔을 정화시키며, 신생의 계기를 얻는다. 동시에 독자들은 문학이 아픈 삶 속에서 그 아픔을 환기시킴으로써 새로운 전망을 열어보이는 문학의 미덕과 만날 수 있다.
▶ ||^여성 예술가의 초상||^!
"소리 높은 주제의식도, 집요한 심리묘사도 없는, 이미지들이 연결되는 소설로 만들고 싶었다. 그런 기법을 선택하고 싶었던 것은, 이제는 그 모든 사건들을 하나의 이미지, 혹은 기호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같은 말 속에서 우리는 이 소설에 노출된, 이미지들을 연결에 따른 작품의 기하학적 공간의 흔들림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작가의 극적인 운명의 하중으로 인한 것일 테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의 매력은 결코 반감되지 않는다. 자신의 지난 시절을 분석하고 정리하는 핍진한 심리묘사와 진솔한 고백은 자신의 상처를 날 것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빛살처럼 퍼져나가는 작가의 의지와 용기와 지혜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이 소설을 두고 작가는 "내가 건넌 강이 더 깊다거나 내가 넘은 산이 제일 힙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 산과 강을 건널 때, 어떤 시행착오를 겪으며 세상을 배워 나왔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자의식이 강한 여자 아이의 영혼의 역사라고 할 수 있고, 감히 말한다면 ||^여성 예술가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이 글을 시작할 때 그것을 써보고 싶었다."(||^작가의 말||^중에서)라고 말했다.
총 
바보 빅터
